들어가며
이번에 읽은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복귀작인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다.
중간중간 난해한 내용도 많고 벽을 두고 배경이 바뀌면서 스토리가 전개되고, 무엇보다 767페이지의 장편소설이었기에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스토리는 긴박하게 진행되지는 않지만, 작가 특유의 1인칭 관점에서의 서술 방식과 책을 덮을 때까지도 지워지지 않는 수많은 물음표들이 매력인 책이다.
이 글에서는 책에 대한 세세한 해석을 다루진 않는다. 이 책을 더 맛있게 읽은 독자들이 이미 작가의 생각에 가장 근접할만한 요약을 작성해 둔 포스트들이 많다.
감상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주인공인 "나"는 고등학교 시절 좋아했던 소녀인 "그녀"를 (하루키 소설이 대부분 그렇듯) 갑자기 잃어버리게 되고 벽으로 둘러 쌓인 도시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 도시에서 나오고 벽의 존재를 알고 있는 소년을 만나고 다시 도시로 돌아가서 꿈을 읽는 일을 하는 줄거리이다.
하루키의 소설에서는 "갑자기 사라지는 소녀"라는 모티브와 그 소녀를 찾는 과정을 다루는 방식으로 주제를 보여준다. 소녀를 찾는 주인공에게 내면적 여정을 시작하게 하는 동기가 되며, 물리적으로 소녀를 찾는 것을 넘어 주인공의 자아 탐색과 성찰의 과정이 된다.
소녀를 찾는 과정에서 주인공은 비현실적인 상황에 놓여진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꿈과 현실 사이를 여행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이는 이야기를 전개하는 서술 방식에 있어서도 드러난다. 이야기의 구조가 시간의 순서대로 되지 않고 비선형적 구조로 짜여져 있다. 시간에 대한 전통적인 인식을 벗어나며, 독자로 하여금 이야기에 더 깊이 몰입하게 한다.
p. 399
이 곳은 높은 벽돌 벽의 안쪽일까 아니면 바깥쪽일까.
일상에서 '벽'이라는 단어는 분리, 고립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벽'은 초현실적이면서 판타지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벽에 대한 묘사에서도 드러난다. 처음에는 쉽게 넘을 수 없는 높이의 '벽돌 벽'으로 묘사하다가도 주인공이 벽을 나가고자 결심했을 때부터 젤리처럼 말캉한 점액질로 표현한다. 벽에 대한 외적인 묘사는 자세하지만 기능에 대해서는 모호하게 서술한다. 내 가치 판단으로 세운 기준에 가까워 질수록 경계가 모호해진다는 뜻일까.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불확실한 벽" 인걸까
벽에 대한 해석이 다양해지면서 그 벽에 둘러 쌓인 도시의 안과 밖에 대한 해석도 다양해진다. 처음에는 인간의 내면 세계와 외부 세계로 읽혀지다가도 나중에는 어린 시절의 순수함의 공간과 현실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장소를 의미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주인공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 도시에서는 순수함을 간직하며 '꿈을 읽는 일'을 하지만 다른 도시에서는 톱니바퀴 중의 하나가 되어 평범한 삶을 산다. 두 곳의 주인공 모두 내면 세계가 복잡해서 정체성과 운명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이러한 고민 속에서 독자는 자신의 삶과 감정을 돌아보게 된다.
p. 462
그리고 내가 나 자신이라는 인간의 어느 쪽에 있는지를.
1인칭 시점의 서술 방식은 독자가 주인공과 더 깊은 감정적 연결을 형성한다. 주인공의 생각과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서 독자가 주인공의 생각과 감정을 직접 경험하게 한다. 거기에 더해 새로운 인물이나 사건을 묘사하는 데 있어 예상하지 못하는 요소를 사용하기도 한다. 전 도서관장인 고야쓰씨와 상실의 감정을 공감할 때도, 백과사전 분량의 내용을 읽기만해도 전부 외울 수 있는 M** 소년이 등장할 때도 현실과는 동떨어진 판타지적 요소를 더하고 있어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어디까지 인지 알 수 없게 한다.
현실과 비현실, 일상과 비일상 사이의 경계를 허물면서 자신만의 해석을 통해 이야기를 완성하게 하는 작가의 의도가 느껴졌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배경과 인물 묘사를 통해 독자의 경험과 감정을 소설에 투영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각자의 해석을 통해 이야기를 완성하는 독특한 경험을 할 수 있다.
(페이지는 전자책 기준이며 서체, 간격 설정에 따라 다를 수 있다.)
p. 81
내가 좀 더 강하면 좋을 텐데. 좀더 힘주어 너를 안고 좀 더 믿음직한 말을 해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단 한 마디로 그 자리에 걸린 나쁜 주문을 확 풀어버리는, 올바르고 적확한 말을.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아직 그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 사실을 슬프게 생각한다.
p. 99
"그게 아니라, 분석이나 충고 따위 하지 않고 말없이 나를 지지해주는 면을."
p. 266
"글쎄요, 연애란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정신질환이다, 라고 말한 게 누구였더라?"
p. 441
도시에 필요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필요한 것, 없으면 안 되는 것만 존재를 허락받는다. 그리고 짐작건데 나 역시 그 도시에 필요한 존재였다. 적어도 한동안은.
p. 475
"당신의 생년월일을 알려주시겠어요?"
p. 530
"고독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죠. 아마 어디에도" "다들 무언가를, 누군가를 원해요. 원하는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p. 709
하지만 그 마지막 밤, 나는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어떤 의미로도 그곳에는 더이상 "내일"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대신 내가 한 말은 "안녕"이라는 한 마디였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마치 태어나서 처음 그 말을 들어본 것처럼 의아한 표정을 짓고 나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여느 때와 다른 작별인사에 당황한 것 같았다.
마치며
그래서 이 책을 추천하는가? 라는 질문에는 애매함이 남는다. '소설은 작가의 상상력과 묘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수동적인 독자에게 매우 피곤한 책일 수 있다. 독특한 상상력과 깊은 상징주의를 가진 책이며, 독자의 참여와 해석을 매 페이지 유도하고 있다. 어디에도 명확한 해석을 제공하지 않으며, 이 책에는 심지어 '작가의 말'도 함께 있다. 작가의 말은 부연설명(변명)을 하는 것이라며 좋아하지는 않는다면서 해석을 돕기 위해 집필 시점의 환경이나 생각 등 직접적인 서술을 가미하고 있다.
그럼에도 작가의 상상력과 독특한 서술 방식은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경험이 될 수 이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비일상적인 요소를 탐험할 기회를 얻고 수동적인 독자라 하더라도 신선하고 즐거운 경험이 될 수 있다. 필자 또한 상당한 거부감이 드는 표현 방식이었지만 지금은 이처럼 신간이 나올 때마다 찾아서 읽고 있다. 하루키를 알던 독자에게는 또다른 하루키월드가 마련된 것이며, 하루키를 알지 못했던 독자에게는 새로운 스타일과 상상력에 열린 마음만 있다면,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책에 대한 리뷰를 작성할 때는 다른 사람의 생각에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 검색과 배경 조사를 최소화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찾아보는 것 또한 이 책을 읽는 것의 연장선에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느낀 소감을 간단하게나마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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